한단지보?

일년 경상비가 천만원도 되지 않는 교회가 건축을 준비한다는 것. 그것은 흔히 계란으로 바위를 친다는 말처럼 무모하기도 하고 또는 해변에서 모래알을 찾는다는 것처럼 모호하기 짝이 없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정말 문제는 교회를 건축해야하는 당위성과 필요성에 있었습니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려다가 계란만 부숴지고 말 것을 깨닫는다면, 누구나 멈짓하게 될 것입니다. 해변에서 특정한 모래알을 찾아야 한다면, 중간에 포기하면 그만일 것입니다. 거기에는 다른 속담도 충분히 곁들일 수 있습니다. 뱁새가 황새를 쫓아가려다가 가랑이가 찢어진다는 말이라든가, 좀더 고급스런 고사성어를 쓰자면, ‘한단지보’邯鄲之步, 즉 남의 것을 흉내 내다가 결국 제 걸음마저 잃어버리고 만다는 말에 의지하여 시작을 하지 않으면 그만입니다. 제 분수를 알고 거기에 맞게 사는 것이 가장 지혜롭고도 현명하다는 것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자족’self-sufficiency에 대해 모자람 없이 강조하고 있는 저로써는 삶 속에서 이를 두고 씨름하고 있는 터라, 교회 건축의 필요성과 당위성에 대해서 묻고 또 물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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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사리교회 예배당에 든 빛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교회를 건축해야한다는 생각은 제 머리와 가슴에서 더더욱 분명해졌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나 스스로 자족하는 문제와 고사리 교회 건축의 문제는 별개이며, 또한 교회 건축의 문제는 지금 현재의 문제가 아니라,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통전적으로 아울러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거듭 말하자면, 교회 건축은 내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지금 내가 자족할 수 있다는 것과는 별개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비전에 따라 움직일 수 있는 방주를 짓는 일에는 그 옛날 노아가 가졌던 마음, 즉 무모함과 모호함을 통째로 껴안고 감수할 수 있어야 하는 마음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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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년 첫 번째 입교식



조회

하지만 이러한 생각의 일반화에 대해서는 철저히 경계해야 한다 싶습니다. 수많은 교회들이 건축을 하면서 겪게 되는 시행착오가 바로 이것이 아닐까 합니다. 하나님의 집을 짓는다는 미명하에 제 욕심을 드러내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욕심에 성도들의 희생을 그럴싸하게 강요하는 것 또한 비일비재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결과가 어떠하든 거룩을 가장한 죄악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성전을 건축한다는 것에 과연 나 스스로의 만족과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무의식은 얼마나 반영되고 있는지 조회해봐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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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년 세족식 (김복순 할머님)



차라리 우공이산

하나님께서는 여러 정황으로 내게 교회 건축의 당위성과 필요성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현재로써는 그것만 주셨습니다. 어떤 방법으로 할 수 있는지 구체적인 언급은 아직 하지 않으십니다. 그걸 여쭈어봐야겠지만, 일단 우리 교회 성도들의 첫걸음을 보고 싶어 하시는 것 같습니다. 이처럼 무모함과 모호함 속에서 너희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냐고 묻고만 계신 것 같습니다. 이제 그것에 응답할 때가 된 것입니다. 한단지보가 아닙니다. 차라리 우공이산愚公移山의 첫 삽이 필요할 뿐입니다.

2005년 4월 1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