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서울은혜교회의 밀알학교
프로테스탄티즘 윤리와 오늘날의 교회건축


하나님께 부르심을 입은 성도들이 예배에 사용하는 건축물을 모두 예배당이라고 볼 때, 일반인들에게는 ‘밀알학교’로 더 잘 알려진 ‘남서울은혜교회’의 교회건축 사업은 종래의 한국교회 건축이 지향해 왔던 신성화된 희극성으로부터 벗어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우리나라의 무분별한 교회건축의 만연된 신념들과 비교해볼 때 교훈적인 화두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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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알학교 내부공간 / 사진출처: 아이아크(iArc) 홈페이지 (http://www.iarc.net)

성당건축과 교회건축의 대조적 신념
고딕의 성당은 신성과 세속이 교묘하게 복합된 유물이다. 몇몇의 귀족들과 종교인들 이외에는 아무런 삶의 희락을 누릴 수 없었던 중세의 암흑시대, 하늘에 닿을 듯이 높이 걸려있는 고딕성당의 첨탑은 밤낮 없이 노동의 현장에서 피땀 흘리며 한숨짓는 성 밖 봉토의 농부들에게는 하늘을 향한 문이었다. 그것은 마치 고난의 현세로부터 하늘나라로 그들을 실어다 옮겨줄 거대한 배의 닻과도 같은 것이었다. 이러한 수직성은 바로 하늘의 자취를 따라 상승하려는 신성함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하늘을 갉아먹는다’는 뜻을 지닌 오늘날 마천루(skyscraper)의 교만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던 중세성당의 이면에는 이 하나의 상징적 형상을 이루기 위하여 수백년 동안 얼마나 많은 희생자를 요구했던 것인가. 바벨탑과 같은 수직상승의 욕구는 수직으로 빼곡이 쌓여진 석재만큼이나 몇몇 인간들의 셀 수 없는 세속적 욕망의 양과 일치하고 있다. 하늘로 향하던 고딕의 신성한 상징적 충동은 수없이 그릇된 조형적 형태들로 변질되었던 것처럼, 오늘날 수많은 교회들이 그들 예배당 첨탑의 높이와 규모의 화려함으로 신의 권위를 대치하면서 또 다른 중세를 향하여 어두워져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진정한 의미에서 신성함은 건물의 화려함이나 규모와는 오히려 반비례하는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여기 남서울은혜교회 밀알학교의 방문에서, 우리는 세속적 욕망으로 신성함을 대체해온 최근 우리나라 개신교 교회건축의 습성과는 사뭇 다른 새로운 감각을 발견할 수 있는데, 거기서 건축가 유걸은 이렇게 말한다. “밀알학교의 시작은 한 교회의 참신한 교회건축관에서 시작된다. 교회건물이 시간적으로 주일날 하루에 집중적으로 사용되고 나머지 6일 간은 부분적으로만 사용되는 것을 생각해볼 때,이러한 교회건축에 많은 비용을 들이는 것은 생활공간이 극히 제약을 받고 있는 한국의 실정에서는 부의 지혜로운 관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밀알학교 건축의 주된 일꾼이 된 남서울은혜교회는 교회의 건축기금을 더 유용하게 사용하기 위해 건축기금을 교육공간 및 교육시설 건립에 사용하고, 교육공간의 일부만을 주말과 주일에 빌려서 사용할 생각을 하였다.”

평당 공사비 약 250만원으로 특수교육기관 학교를 1997년 성공리에 준공한 것은 건축주측 교회의 이해와 건축가가 지닌 재료와 형태와 기능에 대한 수준있는 건축적 윤리가 어우러져 이룬 작품으로 보인다. 우리는 두 가지 의미에서 건축가 유걸의 남서울은혜교회 건축을 살펴볼 수 있다. 그 하나는 상징적 역할에 관한 개신교적 측면에서 빛에 대한 재고이고, 두번째는 건축적 윤리로서의 순수한 재료와 기능주의적 건설자세를 통한 내핍의 미학을 들 수 있다. 이는 금욕과 성실한 근로에 힘쓰는 종교적 생활태도로 대변되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적 배경과 그 궤를 같이하고 있다.


빛의 상징성과 실제성
남서울은혜교회의 홀 전체에 가득히 자연광을 끌어들인 작업은 아주 성공적인 방향설정이다. 이는 비단 기독교인의 삶이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한다는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직접적이고도 형태적인 상징성 이외에도, 개신교의 소중한 신앙적 윤리인 근면과 절제의 교리가 건축적 아이디어로 접목된 경우로 볼 수 있다. 그는 예배당의 무대를 지배하는 거대한 십자가 장식 이외에도 학교건물 전체를 밝게 비추는 아트리움의 효과로 학교의 기능에 신성한 태양광선의 복합적 의미를 상징적으로 추가하고 있다. 자폐증의 정서장애를 가지고 있는 어린이 한명을 위한 자리에 여덟 명의 어린이들이 입학을 원할 정도로 깊은 호응도를 가진 좋은 시설, 그리고 운영의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는 밀알학교측의 희생적인 기독교정신은, 자기들만을 위한 배려만으로 스스로를 살찌워왔던 오늘날 한국교회의 어두운 면에 이미 의미있는 빛으로 존재한다. 이 홀의 거대한 천장은 가득히 태양광선을 들여오면서 기독교교리의 구체적 상징이 된다. 중세에서 비롯되었던 고딕의 환상은 빛으로 하늘의 신성함을 상징하려 했지만 여기서는 빛의 순수한 기능, 즉 어둠을 밝히고 사회를 밝히는 실용성이 더 우선적인 상징의 효과로 대체되어지고 있다.


내핍의 미학
여기에 덧붙여 건축가 유걸이 구사하는 건축의 프로테스탄트적 태도로서, 먼저 불필요한 장식을 배제한 재료의 솔직한 사용을 들 수 있다. 20세기 초 비엔나의 젊은 건축가 아돌프 로스(Adolf Loos)가 장식적 건축양식을 향하여 최초로 공격을 감행한 이래, 독일의 건축가 미스(Mies)의“적을수록 좋다”(Less is More)라는 청교도적 격언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교회들은 아직도 몇 세기 이전의 장식적 건축방법에 열중하고 있다. 그러나 남서울은혜교회에서 일관되게 사용되는 투명하고 가벼우면서도 구조적인 과감성을 갖는 천정면은, 독특한 장식과 더불어 4백여 년 동안 성스러운 명예를 절대적으로 누렸던 중세 고딕성당의 스테인드 글라스에 족히 비할 수 있다. 천정의 유리블럭 재료는, 강렬한 직사광선은 차단하면서도 일정한 조도의 빛을 학교 중앙홀 전체에 가득히 공급하고 있다. 물론 이것은 지붕마감 재료의 역할까지도 동시에 잘 감당해 낸다. 이 지붕은 자연조명방식에 따른 건설의 경제성을 가짐은 물론, 어린이들 특히 정서장애를 겪고 있는 이 학교의 이용자들에게 내부로 보호되면서도 마치 외부와 같이 밝은 홀을 제공한다. 그리고 주일이 돌아오면, 이 은총의 태양빛이 가득한 홀에서 성도들은 그 빛의 근원이신 창조주 하나님을 찬송하고 예배한다. 이 교회에서 필자가 겪은 구조의 노출과 노출콘크리트는, 방문 전에 가졌던 염려와는 달리 전혀 공격적이지 않았으며, 오히려 명랑하고 쾌적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이것은 아마 충분한 자연조명이 음침하고 구석진 공간의 존재가능성을 모두 제거한 데서 온 것으로 보인다. 밝은 자연광의 존재가 날카로운 형상의 위험성을 무마하고 있는데, 여기서 빛은 재료의 물성을 부드럽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구조의 노출이나 콘크리트 재료의 솔직성에 대한 우려는 장식과 치장의 문화에 깊이 젖어있었던 구세대들의 과민반응과 관계한다. 특히 공장에서나 사용될 법한 메탈재료가 내외로 덮인 볼륨을 처음 접한 성도들, 정서장애자의 부모와 교사들에게는 그 재료의 물성이 큰 걱정거리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러나 어린이들과 사용자들은 초기의 우려와는 달리 이제 별다른 부담을 느끼지 않고 있다. 무엇보다도 교회건물이면서 학교인 밀알학교가 ‘밀알’의 의미를 잘 드러내고 있는 표현이다. 소박하고 절제된 산업재료와 노출된 콘크리트의 선택은, 화려한 대리석과 화강암으로 마감된 그 어떤 건축물들보다 더욱 더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고 스스를 희생하는 밀알의 모습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경제성과 실용성을 바탕으로 한 유걸의 신교주의적 미학은 아직도 많은 개선의 여지를 두고 있는 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세계적으로 번져나갔던 포스트모던과 해체의 건축세대가 가져다 준 과다한 장식과 무분별하게 굴절된 언어가 남발되는 우리시대의 건축적 상황에서, 그리고 긍정적인 미래를 예측하기 어려운 IMF 경제체제에 처해있는 오늘날 한국의 상황에서, 유걸 건축의 프로테스탄티즘적이고 산업건축적인 접근은 나름대로의 중대한 가치를 지닌 사건일 수 있다. 여전히 장식적 전통과 권위주의적 형태놀이에 젖어있는 한국교회 건축의 전근대적 노정에서 새로운 향방을 지시하는 하나의 신선한 이정표일 수 있다.

이은석 | 1998. 11.